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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저자 : 킴벌리코니시
출판사 : 그린비
출판년 : 2007
ISBN : 9788976825001

책소개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그 근원을 밝히다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두 천재의 은밀한 투쟁을 밝혀낸 팩션형 역사 교양서이다.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와 반유대주의의 근원을 추적하고 있다. 그 결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갖게 된 최초의 유대인, 즉 홀로코스트의 근본 원인임을 주장한다. 방대한 자료와 수많은 인터뷰, 추리소설을 능가하는 추론을 바탕으로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의 감춰진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소년 시절부터 시작된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의 투쟁을 살펴본다. 히틀러는 국립실업학교에서 만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증오 때문에 반유대주의를 갖게 되었고,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은 반세기에 걸쳐 역사의 궤적을 바꿔놓을 수많은 사건 속에서 서로 투쟁을 벌였다. 저자는 1904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부터 1945년 나치 패망에 이르기까지, 두 인물 간에 벌어진 투쟁과 그들의 사상 및 활동에 영향을 준 19~20세기 유럽의 지성계를 추적하고 있다.

또한 두 천재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계가 있었던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당시 예술계의 반유대주의적 정서와 철학적인 영향 관계 등을 추적함으로써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공고하게 만들었던 사상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당시 문화ㆍ예술계의 지형과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적 바탕 등 풍부한 역사ㆍ철학적 지식을 함께 전해준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홀로코스트의 근원,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
- 20세기 두 천재의 은밀한 투쟁을 밝혀낸 팩션형 역사 교양서

20세기 최대의 만행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을까? 유대인의 선민사상이나 속물성, 독일 국민이나 나치의 반유대주의 등 지금까지 숱한 원인이 제기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저자 킴벌리 코니시는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장본인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반유대주의를 추적해야만 그 근원을 알 수 있다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야말로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갖게 된 최초의 ‘유대인’, 즉 홀로코스트의 근본 원인이라고 말한다. 1904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부터 1945년 나치 패망에 이르기까지 두 인물 간에 벌어진 은밀한 투쟁과 그들의 사상과 활동에 영향을 준 19~20세기 유럽의 지성계를 추적함으로써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뿌리부터 파헤친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와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주장하는 팩션형의 역사 교양서이다. 추리소설을 능가하는 추론을 통해 20세기 초에 일어난 사건들 이면에서 투쟁하는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홀로코스트 배후의 진실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비잔티움 연대기』 등 역사 관련 교양서를 꾸준히 번역하고 있는 남경태의 솜씨로 번역되었다. 당대 지성계의 모습과 사상적 맥락들을 알기 쉽게 전달해주고 있으므로, 독자들은 두 천재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이 관계맺고 있는 예술가·사상가들의 모습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04년 오스트리아 린츠]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그 근원을 밝히다!

“레알슐레(오스트리아 린츠의 국립실업학교)에서 나는 유대인 소년 한 명을 만났다. 우리는 모두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우리가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그가 경솔하다고 의심하게 되어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본문 39쪽)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말한 이 유대인 소년은 누구일까? 그들 모두가 조심스럽게 대했고 그다지 신뢰하지 않은 소년을 히틀러가 훗날의 자서전에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히틀러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는 데 그 소년이 기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소년은 말끔한 옷차림을 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더듬이에 다른 급우들이 잘 쓰지 않는 ‘당신’(Sie)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가문이 이룬 부와 권세,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했으며,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겉돌았을 뿐 아니라 친구를 사귀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였다. 그 소년은 바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을 급우들은 두운까지 맞춰가며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초라하고 바람 부는 길을 걸어 빈으로 간다네.”(Wittgenstein wandelt wehmutig widriger Winde wegen Wienwarts. 본문 34쪽) 동갑내기 히틀러는 급우들보다도 훨씬 더 비트겐슈타인을 미워했다. “언젠가 아돌프는 한 소년에게 ‘두 자우유트!’(이 더러운 유대놈아)라고 소리쳤어요. 그 소년은 깜짝 놀랐죠.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유대 혈통인 줄 모르고 있다가 몇 년 뒤에야 알게 되었거든요.”(본문 8쪽. 예칭거, 『히틀러의 소년기』Hitler Jugend)
히틀러가 비트겐슈타인을 그토록 미워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에게는 없는 문화적 특권을 비트겐슈타인이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미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지만, 그것을 충분히 누릴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철강업으로 재계를 주무를 정도로 막강한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1903년 열린 분리파(구스타프 클림트가 1897년 예술가협회를 탈퇴한 후 창설한 예술가 단체) 전시회를 후원하고, 브람스가 그의 집에서 사적인 공연을 할 정도로 예술 분야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경솔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가문의 배경과 예술작품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으므로, 히틀러는 그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에 걸쳐 반유대주의를 주장하고 실행에 옮긴 히틀러는 유대인 일반에게 적용하기 힘든 근거로 그들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비난의 근원은 사실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것들이다. 당시 보통의 유대인은 비트겐슈타인 가문과 같이 재계를 주무르거나 독일의 미술과 음악에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주식시장을 조작하고, 예술을 상업화해서 타락시켰으며, 볼셰비즘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며 그들을 비난했지만, 그 화살은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몫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빈보다도 린츠를 더 중요한 예술의 중심지라 믿고서는 훗날 그곳에 유럽 전역에서 약탈한 예술품들을 보내 ‘아돌프 히틀러 박물관’에 소장하도록 했다. 어린 시절 누리지 못한 예술 향유를 린츠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린츠에 헤르만 괴링 제철소를 세운 뒤 비트겐슈타인 가문이 소유했던 제철소(비트코비츠 제철소)를 흡수하기도 했다. 어릴 적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증오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다!

이 책은 “히틀러가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도 없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독일 내에 널리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무시하진 않는다.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와 더불어 히틀러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념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이념들은 유대인을 향한 그의 증오를 스스로 ‘과학화’라는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계기였던 것이다.

〈히틀러에게 반유대주의를 물려준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는 히틀러의 우상이었다. 린츠 시절부터 그에게 열광한 히틀러는 오페라 『디 마이스터징거』(Die Meistersinger)를 정확하게 외울 정도로 그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그 음악을 완전히 외웠고 휘파람으로 모든 곡조를 따라 불 수 있었다. 묘하게 예민한 떨림음이었으나 곡조는 완벽했다.”(본문 40쪽) 훗날엔 『로엔그린』(Lohengrin)의 가사를 외워 보임으로써 독일의 음악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바그너에게 얼마나 심취했는지는 그의 연설만 봐도 알 수 있다. “[히틀러의 연설을 들으면] 주악상, 장식, 대위법, 음악적 대비와 전개가 서로 얽힌 전반적인 양태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교향악의 구성을 지니며, 바그너의 음악에서 트롬본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극적인 클라이맥스로 끝난다.”(본문 41쪽)
그러나 히틀러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이다. 바그너는 『음악의 유대주의』(1850년)라는 책에서, 예술의 정신이 쇠퇴하는 과정을 개괄하면서 그 원인이 유대인이 예술계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은 비겁하고, 예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 대립되며, 유대인의 예술은 다른 사람들의 창조적 작품을 도용한 결과라며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표명했던 것이다(본문 178쪽).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가 끊임없이 유대인을 비난하는 말은 이런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발언과 닮아 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의 전거이다.
이런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 1831~1907) 등 19세기 말 음악계와 연결된 비트겐슈타인 가문과의 악연 때문이다.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 바그너는 어린 시절 유대 혈통의 자인-비트겐슈타인 가문 출신이자 비트겐슈타인과 친척 관계인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리스트의 정부)으로 인해 어머니에게서 멀리 떠나 보내졌다. 이 때문에 바그너가 이 후작부인을 경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바그너는 『음악의 유대주의』를 발표한 이후 절친한 동료이자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하임과 결별하고 원수지간이 되었다. 요하임은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양자로 들어온, 바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삼촌이었다.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의 사상적 스승 쇼펜하우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는 전통적인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의 학살극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사건이므로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적 연원을 검토해야 그 배후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로부터 그것을 찾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가 설파한 아리아 교리와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이 쇼펜하우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응용하여 철학적 체계화를 시도했으며, 히틀러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하나의 교리로 변질시켰던 것뿐이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철학적 문제의 해답을 알려주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면서 그것을 ‘의지’(Will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전쟁 중에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다니고, 상당량의 내용을 외울 정도로 쇼펜하우어에 매료되었던 히틀러는 이 개념을 민족(인종)의 관점으로 곡해해 아리아인의 이상이라는 ‘한 가지 생각’과 ‘유대 국제주의’라는 위험 물질로 구분해버렸다. 이에 ‘단일한 아리아인의 의지’를 위해 단결해서 싸워야 하며 ‘유대 국제주의’에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론을 펴기 시작했다.
한편, 쇼펜하우어를 이론적으로 계승한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이어받아 고립된 의식·개별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소유 이론(no-ownership theory, 이 책 3부 참조)을 펼쳤다. 독립된 주체를 부정하고 전체를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비소유 이론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론이며, 20세기 분석철학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면서도 공산주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정신에 있어서의 사회주의’라 할 만한 이 비소유 이론 때문이었다.

이렇듯 이 책은 당시 예술계의 반유대주의적 정서와 철학적인 영향 관계 등을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공고하게 만들었던 사상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문화·예술계의 지형과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적 바탕 등 풍부한 역사·철학적 지식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반유대주의 논의에 있어서 이 책이 갖는 장점은, 하나의 사유가 도그마로 변질되는 과정과 그것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히틀러와 나치즘은 사라졌고 홀로코스트는 지나간 과거지만, 민족과 인종 개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오늘날에도 그것은 언제라도 되살아날 수 있는 유령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트리니티칼리지] 비트겐슈타인, 히틀러에게 반격을 가하다!

이 책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추적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활동의 의의에 대해서까지 추적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트겐슈타인의 공산주의 활동을 밝혀내는 한편, 그 활동이 히틀러의 나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증명한 것이다.
실업의 문제, 파시즘의 폐해, 점증하는 전쟁의 위험 등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했으나 실천적으로는 지지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자이다.”(본문 104쪽) 그래서 그는 1929년 빈을 떠난 후 영국 트리니티칼리지로 건너가 가이 버제스(Guy Burgess), 킴 필비(Kim Philby),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 등 공산주의 활동가들과 조우했다. 그리고 경제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에게서 큰 자극을 얻었던 그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삶의 방식이라고 여기고 공산주의 경제학자의 처방대로 실업자들이 조직되어야 하며, 당원은 노선에 따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신념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공산주의 활동과 더불어 신념을 공유할 만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암호 해독 기술을 포함한 주요 정보를 소비에트에 전달하는 등 첩보활동을 통해 동부전선에서 소비에트가 독일을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에게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그 소년이 유대인을 구한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저자 코니시는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논리철학 논고』도, 『철학적 탐구』도 아니라 베를린 벙커에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히틀러의 손가락이었다.”(본문 173쪽)
이 책은 이렇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라는 주제를 통해 홀로코스트와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장을 마련한다. 독자들은 20세기 초 세계사적 사건의 한가운데 서 있는 두 천재의 삶을 통해 역사의 질곡을 탐험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지식인들과 관계맺고 있는 그들의 사상적 활동을 통해서 역사에 대한 풍부한 교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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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한국의 독자들에게

서론

제1부 두 천재의 만남

1장_린츠의 유대인

2장_트리니티의 첩자들

제2부 반유대주의의 근원

3장_바그너와 『음악의 유대주의』

4장_쇼펜하우어의 두 계승자

5장_신비주의적 경험과 자아

6장_쇼펜하우어, 로젠베르크, 인종 이론

7장_주술, 마법, 히틀러

제3부 비트겐슈타인의 비소유 이론

8장_마음을 여는 열쇠

9장_정신과의 합일

10장_비트겐슈타인과 정신적 사회주의

11장_아비세나와 아베로에스

12장_논증: 아퀴나스와 스트로슨

결론

부록_클라우제비츠, 히틀러, 루트비히 아돌프 비트겐슈타인 공작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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