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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동아시아사의 행방)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동아시아사의 행방)
저자 : 이성시
출판사 : 삼인
출판년 : 2019
ISBN : 9788964361658

책소개

한·중·일 격랑의 근현대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고대사 연구의 장!
일국사관과 식민지주의를 넘어서 동아시아 역사학의 미래를 전망한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이성시 교수는 지난 2001년 펴낸 『만들어진 고대』(삼인)라는 인상적인 저작을 통해 동아시아의 고대 텍스트가 근대 국민 국가 체제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 텍스트로 어떻게 둔갑하였는지를 밝히는 동시에, 이 같은 '만들어진 고대'의 역사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고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축을 대담하게 시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역사와 해석 사이에 개입하는 국가주의 담론의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한국 및 동아시아 지성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신간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는 『만들어진 고대』에서 개진된 문제의식을 한층 심화, 확장시킨 완결판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이성시 교수는 인식 주체가 처한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대사 연구의 한계를 거듭 지적하면서, 국가주의의 억압적인 구속으로부터 역사 연구를 탈각시켜,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공유하기 어려워 보이는 고대사 인식에 대한 상호 이해와 공유 가능성, 고대사의 공통 이해에 이르는 길로서 어떤 방법이 모색될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탐문한다. 이런 의도는 “역사 연구가 어떤 시대에 어떠한 요청에 의해 논했는지를 역사적으로 밝히는 것이 전제”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고대사에서 근현대사까지 역사 해석과 수용의 문제로 일본 그리고 중국과 늘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는 충만한 지적 영감을 안기면서 객관적이면서도 균형을 아우르는 역사 인식의 한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한·중·일 격랑의 근현대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고대사 연구의 장!

일국사관과 식민지주의를 넘어서 동아시아 역사학의 미래를 전망한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이성시 교수는 지난 2001년 펴낸 『만들어진 고대』(삼인)라는 인상적인 저작을 통해 동아시아의 고대 텍스트가 근대 국민 국가 체제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 텍스트로 어떻게 둔갑하였는지를 밝히는 동시에, 이 같은 '만들어진 고대'의 역사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고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축을 대담하게 시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역사와 해석 사이에 개입하는 국가주의 담론의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한국 및 동아시아 지성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신간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는 『만들어진 고대』에서 개진된 문제의식을 한층 심화, 확장시킨 완결판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이성시 교수는 인식 주체가 처한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대사 연구의 한계를 거듭 지적하면서, 국가주의의 억압적인 구속으로부터 역사 연구를 탈각시켜,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공유하기 어려워 보이는 고대사 인식에 대한 상호 이해와 공유 가능성, 고대사의 공통 이해에 이르는 길로서 어떤 방법이 모색될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탐문한다. 이런 의도는 “역사 연구가 어떤 시대에 어떠한 요청에 의해 논했는지를 역사적으로 밝히는 것이 전제”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고대사에서 근현대사까지 역사 해석과 수용의 문제로 일본 그리고 중국과 늘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는 충만한 지적 영감을 안기면서 객관적이면서도 균형을 아우르는 역사 인식의 한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국민국가 이야기로서의 고대사를 넘어서

저자는 이 책의 논의를,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고대사 연구가 국민국가 형성기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중·일 세 국가는 고대사를 일국사一國史의 틀 속에서, 그것도 근대의 콘텍스트에 끌어당겨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와 타인을 갈라놓는 내부의 담론은 상호 이해를 가로막으며 국가 간의 울타리를 더욱더 높여왔고, 각국의 욕망이 투사된 고대사는 서로 부딪치며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장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국사를 넘어서, 근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고대사의 상像을 새로운 틀에서 재구축하는 작업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저자가 『만들어진 고대』의 문제의식을 공유 계승하면서 후속작업의 결과물을 묶어낸 이 책은, 한·중·일 3국의 역사적 이해관계가 여전히 현실 외교의 긴장 속에서 맞물려 있는 오늘날에도 뜨겁게 주목 받으며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 각국은 현재 자국의 현실과 욕망을 고대사에 투영하여 해석하면서 고대사 연구의 장은 치열한 전장과 다름없게 되었다. 한일 간에는 삼한정벌설·임나일본부설과 기마민족정벌설·분국론 등이 맞서고 있으며, 그 증거의 하나로 제시된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한중 간에는 발해사의 귀속을 둘러싼 문제가 역사 논쟁을 넘어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저자는 근대국가에 의해 창출된 역사에서 근대국가의 욕망을 조명하며 일국사를 벗어난 시각으로 그 해체를 시도한다.

식민지기에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한국사가 의존적이고 정체되었다고 강조한 구로이타 가쓰미의 사례를 통해 국가이데올로기에 동원된 학문에 관한 반성을 촉구한다. 쓰다 소키치는 근래 일본의 혐한 흐름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인물이다. 서양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은 그는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의 오리엔트를 창출하려고 했다. 근대 일본인이 공유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일국사로서, 국민국가의 이야기로서의 고대사에서 해방되기 위한 이론 틀의 하나로 동아시아세계론을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역사 연구는 인식 주체가 처한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숙명에 있지만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는 데에서부터 구속의 탈각은 시작한다고 본다.



챕터별 주요 내용



제1부 ‘국민국가 이야기’



제1부 ‘국민국가 이야기’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고대사 연구가 국민국가 형성기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에 대해 논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 이야기는 국가 간의 울타리를 높이며 상호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에 울타리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이는 자기와 타인을 가르는 내부의 담론이기 때문이다. 많은 비판을 받은 지 오래지만 19세기에 창출된 국민국가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남아서 동아시아 각국에서 오히려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삼한정벌설과 기마민족정벌설

대표적인 예로 한일 간에는 삼한정벌설과 기마민족정벌설이 있다.

일본의 진구神功 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백제와 고구려로부터도 조공을 받았다는 삼한정벌은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록된 이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드러내는 실례로 오랫동안 일본인의 의식을 지배해왔다.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진구 황후 신사에 들렀고, 메이지정부는 조일수호조규로 조선의 항구를 개항시키고 조선에 대한 침탈을 본격화할 무렵 진구 황후의 초상화가 그려진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시켰다. 한국병합 후에는 양국 간 관계가 옛 상태로 복구된 것이라고 평하며 감격하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1970년대 기마민족정복설과 분국론이 제기되었다. 기마민족정복설은 선진문화를 가진 기마민족(부여나 고구려)이 일본에 진출해서 야마토 조정을 세우고 통일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분국론은 삼한 삼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분국을 세웠으며 그 분국은 본국에 대해 식민지 관계를 맺고 있다가 고대국가로 통일되었는데 그 주체인 야마토 왕권의 유력자는 한국계 귀족이라는 것이다.

진구 황후는 가공의 인물로 밝혀지고 삼한정벌설은 학계에서 부정되었지만 아직도 일본인의 기억에 남아 있고, 그에 대한 대항 관계 속에서 생성되어 강화된 기마민족정복설·분국론은 남북한에서 국민적 기억으로 퍼져 있다.



발해사의 귀속

또한 한중은 발해사의 귀속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다.

한국은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계이고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으므로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국가로 보며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피지배층인 말갈족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축소한다. 중국은 발해를 당대唐代 소수민족인 말갈인의 지방정권이라는 공식 견해를 내세우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발해를 다민족 국가로 보기 때문에 지배층의 일부인 고구려계의 존재에 대해 애써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남북한은 발해를 한민족의 국가로 간주함으로써 남북 분단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발해·신라 병립 시대에 투영하며 통일을 향한 전망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50개 넘는 여러 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소수민족이 차지하는 전 국토의 60퍼센트 지역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과 역사적 근거가 있는 영토로서 자리매김하려는 현실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



제2부 ‘출토 문자자료와 경계’



제2부 ‘출토 문자자료와 경계’는 광개토왕비문을 중심으로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출토 문자자료를 둘러싼 연구 동향을 다뤘다. 한반도와 관련 있는 편찬 사료는 대단히 적은 상황이라 비석이나 금속에 기록된 금석문, 나무나 대나무에 기록된 목간이나 죽간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것들은 근대국가와는 다른 시대의 자료인 만큼 근대국가 이데올로기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근대 역사학은 이러한 자료를 오히려 철저하게 ‘국민국가의 이야기’에 활용해왔다.



광개토왕비의 해석

가장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왕비이다.

비문 1775자 가운데 신묘년(391년) 조條의 32자(百殘 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 以爲臣民)에만 유독 관심이 모아졌다. 일본은 1880년대 비를 발견한 후 ‘백제,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조공하고 있었는데, 왜가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와 임나·신라를 쳐부수고 왜의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고 이를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기’나 임나일본부와 결부해 해석했으며 이러한 해석의 틀은 그 후의 연구를 구속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일제에 의한 개찬설改竄說이 제기되고, 비문에 대해 고구려 우위의 정세가 쓰인 텍스트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남북한 학계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비석이 훼손된 것은 비석 탁본을 업으로 하던 이들이 탁본 작업을 위해 회칠을 하고 불을 질러 이끼를 제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이전의 탁본도 세상에 나오면서 일제에 의한 개찬설은 부정되었다. 비문에 주어, 목적어 등을 보충하여 고구려 우위의 정세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남북한에서 아직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현재의 일국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고구려의 콘텍스트에서 비석을 바라보고, 비문 32자를 1775자 전체의 구성 속에서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集安에 우뚝 서 있는 6미터 남짓의 광개토왕비는 일단 그 크기에서도 일반 묘비나 묘지墓誌와는 확연히 다르다. 내용에서는 상당 부분을 광개토대왕의 무훈武勳에 할애했는데 이 역시 일반적인 왕의 묘비 내용 구성과 다르다. 게다가 왕의 뛰어난 무훈을 모두 기록한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비문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3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고구려 창업의 유래, ?광개토왕의 무훈, ?수묘인守墓人 330가家의 내역과 그들에 대한 금령과 벌칙이 적혀 있다. 수묘인은 한족韓族과 예족으로 대부분 구성되었는데, ?의 무훈이 바로 이들 한족과 예족을 수탈해 온 지역과 관련된 것이다. 평양 천도를 앞둔 상태에서, 세월이 흐르며 수묘제도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고자 석각石刻문서로서 광개토왕비를 세운 것이다.

왕의 무훈 기사를 다시 살펴보면, 기사마다 ‘왕궁솔’(왕이 친히 군대를 이끄는 직접적인 군사행동)과 ‘교견’(왕이 군대를 파견하는 간접적인 군사행동) 중 하나를 상투구로 수반한다. 그런데 ‘왕궁솔’이 들어간 군사행동은 왕의 친정親征에 의해서만 타개되는 불리한 정세를 보이는 법칙성을 띠고 있다. 왕의 위대함을 돋보이기 위한 장치(문장 꾸밈)인 것이다. 문제의 32자도 ‘왕궁솔’이 들어간 기사에 들어 있다. 비문에서 ‘왜’는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거나 가야의 여러 나라와 함께 백제를 지원하여 고구려에 맞서는 난적難賊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광개토왕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는 트릭스터인 것이다. ‘왜’는 고구려의 내부 결속을 확고히 하고 광개토왕의 위업을 빛내는 존재로 기능한다. 이 32자 속 왜의 활약에 대해 인식론적 환원을 거치지 않고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해석할 수는 없다. 또한 광개토왕비문에 고구려에 불리한 상황이 서술될 리가 없다고 하는 견해에도 수정이 필요하다. 근대에 형성된 고대사의 상像을 상대화하고 새로운 틀에서 재구축하는 일이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데 광개토왕비문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3부 ‘식민지와 역사학’



제3부 ‘식민지와 역사학’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의 고대사 연구가 배태하고 있는 문제점의 먼 원인으로 식민지주의와 역사학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이 결여되어 있으며 식민지 지배·피지배를 초월한 내부적 식민지주의의 자각과 반성이 없는 한 현재의 고대사 연구가 껴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음을 논한다.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구로이타 가쓰미는 일본의 고문서학을 확립하고 문화재 보존과 사학 발전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학자인데, 조선총독부가 벌인 『조선사』 편수와 조선의 고적 조사·보존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단군 신앙이 급속히 퍼지며 민족정신을 고무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조선사』 편수에 착수하여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단군 신앙은 최신의 것으로 한반도의 문명은 중국으로부터 왔으며 조선은 오래도록 쇠퇴하여 일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는데 고적 조사와 보존 사업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로이타는 유럽의 박물관과 유적을 둘러보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고고학을 철저하게 연구해서 한반도에 적용했다. 발굴한 유물을 각지의 박물관에 전시하고 도록을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일본이 조선이라는 식민지의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다. 구로이타는 일본에서도 국가이데올로기에 고고학을 동원하는 수법을 그대로 구사했다. 지배 도구로서의 고고학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 시각에는 맹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백남운白南雲

1930년대에 간행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은 그 시대 한국인의 유물사관 수용과 학술적 도달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발전단계설을 한국사에 기계적으로 적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백남운은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최초로 한국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려고 했다. 당시 일본 학계에서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백남운은 세계사적인 발전법칙이 한국사에서도 예외 없이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한 기조에서 민족주의사학에서 중시하던 단군에 대해 씨족사회 말기에 해당하는 농업공산체農業共産體 추장의 특수한 호칭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역사법칙의 운동 과정을 무시하고 피정복자가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주장하면 “제국주의적 구속에서 해탈해야 할 갱생의 길”로 통하는 “필연적인 역사 동향을 간파할 수도 없다. 아니, 그 동향을 거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신채호나 최남선이 주장하는 ‘특수사관’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현재 일본에서 일고 있는 혐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인물로 사학자 쓰다 소키치가 있다. 문헌고증학자로 한·중·일의 역사와 사상사 등 다방면에 걸쳐 족적을 남겼으며 한국 사학계에도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학자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듯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 운명공동체론과 대동아공영권 등을 주장했는데, 쓰다는 이에 대해 중일은 이질 문명이라고 비판했다. 이것이 시국에 대한 저항이나 지배적인 조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 한때 높이 평가되기도 했으나 이는 그의 근본 의도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가 중일이 이질 문명이라고 한 것은 중일 양자의 평등과 공존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자 등 공통의 문화를 강조하면 일본에 대해 중국인이 우월감을 가지게 할 것이므로 일본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중국에 대한 동질화가 아니라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쓰다 소키치의 아시아 인식을 통해 근대 일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한 아시아 인식의 원형을 알 수 있다. 그가 보편이라 믿은 것은 서양문화(=세계문화)인데 그에게는 서양이 보편적 기준으로서 기능하므로 각 나라는 서양과의 거리(차이)에 의해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서열화된다. 일본은 일찍이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았지만 그 흐름에서 뒤떨어진 중국은 멸시의 대상이었으며 한국은 중국보다 더 낮은 대상이었다. 일본은 자신 속에 있는 서양적인 요소를 포착하여 오리엔트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지우고, 서양의 오리엔트처럼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 자신의 오리엔트를 창출하려고 했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와 사상을 전공했음에도 두 나라에 대한 멸시를 가득 담은 그의 글이 남아 있다.

“서가에 가득 찬 서책은 (…) 짱과 요보(중국인과 한국인에 대한 멸칭)의 과거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권모와 술수, 탐욕과 폭려暴戾, 허례로 감춘 험인險忍한 행동과 교묘한 말로 꾸민 냉혹한 마음이 이 수천 권의 책자 한 장 한 장에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 그들이 내뿜는 독기에 마음과 몸을 다치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 이들 책에서 일어나는 더럽고 흐린 공기로 내 머리가 짓눌려서 견딜 수 없이 싫어지는 것은 무리도 아닐 것이다.” [서일기鼠日記에서]

쓰다는 중국이 싫으면서도 구태여 중국 연구에 종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말했다. “똥이나 오줌을 맛있겠다고도 좋은 냄새라고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매일 그것을 시험관 속에 넣거나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학자가 있다. 나의 지나(중국) 연구에도 첫째로 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사물이든 그 본질, 그 진상을 알려고 하는 순수한 학문적 흥미 때문이다.” [1926년 5월 24일, 25일 追記, 『津田左右吉全集』27(1965년), 270쪽]



제4부 ‘동아시아세계론의 행방’



제4부 ‘동아시아세계론의 행방’은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가 이론화하고 태평양전쟁 패전 후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동아시아세계론’을 검토한다. 이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공존과 연대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그 이전의 학문을 비판하는 가운데 생겨난 새로운 시도이다. 물론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과거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역사학이나 역사 교육을 논할 때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은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공유하기 힘든 고대사 인식이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상호 이해가 가능한지, 고대사의 공통 이해에 이르는 길로는 어떤 방법이 있는지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연구가 내포하는 문제의 하나로 국민교화를 목적으로 한 일국사관이 있는데, 그러한 사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선 고대사 연구부터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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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머리말

한국어판 서문



제1부 국민국가 이야기

제1장 고대사에 나타난 국민국가 이야기―일본과 아시아를 가로막는 것/제2장 근대국가의 형성과 ‘일본사’, ‘일본문화’의 발생―새로운 동아시아론을 위하여/제3장 삼한정벌―고대 한반도 지배 담론/제4장 발해사를 둘러싼 민족과 국가―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제2부 출토 문자자료와 경계

제5장 출토 사료는 경계를 넘을 수 있는가/제6장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제7장 석각문서로서의 광개토왕비문



제3부 식민지와 역사학

제8장 콜로니얼리즘과 근대 역사학―식민지 통치하의 조선사 편수와 고적 조사를 중심으로/제9장 조선왕조의 상징공간과 박물관/제10장 식민지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사학―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를 중심으로/제11장 근대 일본의 아시아 인식―쓰다 소키치의 중국·한국 인식을 중심으로



제4부 동아시아세계론의 행방

제12장 동아시아세계론과 일본사/제13장 ‘동아시아’라는 역사관―동아시아세계론으로 본 역사와 문학



후기

옮긴이 후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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