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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저자 : 김응종
출판사 : 푸른역사
출판년 : 2022
ISBN : 9791156122180

책소개

“인권 신장의 신기원”-“폭력으로 얼룩진 비극”
찬양과 저주 사이, 프랑스혁명의 민낯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한 입체적 조명
프랑스혁명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위대한 실험이요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일 년 남짓한 ‘공포정치’ 기간에 50만 명이 감옥에 수용되었고 3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다는 사실 등 폭력성 또한 혁명의 또 다른 얼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의 프랑스 혁명사 이해는 혁명을 예찬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감이 있다. 이 책은 ‘인권’이라는 ‘빛’에 초점을 맞추어 혁명을 바라보았던 그 같은 흐름에서 벗어나, ‘폭력’이라는 ‘어둠’에도 시선을 돌려 혁명의 참모습을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기획한 것이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혁명을 ‘쫓아가지’ 않는다.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지은이는 혁명과 반혁명, 혁명가, ‘혁명사’로 나누어 혁명의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사건을 날줄로, 혁명가를 씨줄로 삼아 혁명의 맥락을 짚어내는 방식이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반혁명 민중봉기와 잔혹한 진압이란 숨겨진 얼굴
1부 ‘혁명과 반혁명’은 혁명의 결실이라 할 인권선언‘들’과 혁명에 대한 ‘반동’을 정리하고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1791년 교황 피우스 6세가 인권선언이 인간의 ‘권리’만 선언했지 ‘의무’는 선언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든가, 올랭프 드 구즈가 인권선언이 남성 중심인 것을 비판하며 〈여성과 여성 시민들의 권리선언〉을 작성했고, 후일 사회주의자들은 소유권을 신성불가침한 자연권으로 규정한 것을 비판했다(45쪽)는 사실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17만 명이 희생된 프랑스 서부의 방데전쟁(64쪽), 리옹 반란, 슈앙(올빼미)이라 불린 농민군 등 우리가 몰랐던 반혁명의 민낯이 드러난다. 지방의 농민봉기가 귀족 주도가 아니었다는 점, 혁명정부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는 사실(77쪽) 등을 접하면 혁명의 ‘신화’가 깨지는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영웅에서 배신자로, 청렴지사에서 독재자로
혁명의 ‘별’ 로베스피에르 외에 라파예트, 시에예스 신부, 콩도르세, 당통, 샤를롯 코르데 같이 반혁명가나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힌 혁명가들을 조명한 2부 ‘혁명가’는 드라마틱하다. 혁명가들의 생애, 사상, 의의를 약전 형식의 글은 간략하지만 신선해서 일반 독자들의 시선을 끌 만하다. ‘두 세계의 영웅’에서 ‘혁명의 배신자’로 몰린 라파예트(229쪽), 1789년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로 혁명의 불을 지폈으나 1799년 보나파르트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을 끝낸 시에예스(268쪽), 잔다르크를 자처해 마라를 살해한 코르데(388쪽) 등의 삶은 보통사람에게 인간적 흥미와 더불어 생각거리를 던진다. 민중은 그의 원칙주의와 청렴함에 열광했으나 시종일관 완전한 ‘개혁’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낸 끝에 동료 혁명가들에 의해 독재자로 몰려 처형된 로베스피에르의 행적(372쪽)은 오늘날에도 자못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읽힌다.

‘정통 해석’과 ‘수정 해석’의 엇갈림
3부 혁명사는 서양사 연구자들 또는 역사 애호가들을 위한 파트다. 프랑스혁명의 비극적 종말을 예고한 버크, 이상을 좇았던 페인을 시작으로 혁명을 보는 역사가들의 시각 변화를 짚어내기 때문이다. 민중사관이라 할 미슐레, 미국 독립혁명과의 차이에 주목한 한나 아렌트에 이어 알베르 소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사, 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혁명사가 꼼꼼하게 정리해냈다. 여기에 이른바 ‘정통 해석’과 ‘수정 해석’의 엇갈림을 소개하면서 지은이는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정통주의 역사가들과 ‘다른’ 생각을 한 것이지 ‘틀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틀린 생각이라고 단죄하는 것이야말로 독선이며 틀린 생각이다.”(529쪽)

지은이는 맺음말에서 “혁명가들이 “혁명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제시한 혁명이념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적을 만들어내고 학살”(568쪽)했다고 지적한다. 아마도 책을 읽고 난 독자들 대부분도 이 책이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578쪽)는 데 동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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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이어서

시에예스는 1789년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로 혁명을 열었으며 1799년에 보나파르트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을 끝낸 사람이다. 프랑스혁명사에서 그의 이름은 무엇보다도 ‘국민의회’의 탄생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 그는 “제3신분은 모든 것이다”, “제3신분은 국민이다”, “국민이 법이다”라는 유명한 공식이 주는 선입견과는 달리 민중을 인정하지 않았다(269쪽).

미국 독립혁명은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공화국을 세우는 정치혁명으로 그쳤으나, 프랑스혁명은 전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제정을 떠받치고 있던 귀족들과 교회의 지배로부터도 벗어나는 사회혁명으로 치달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제정과 연대하고 있던 유럽의 전제군주들의 간섭과도 싸워야 하는 일종의 국제혁명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정신의 진보에 크게 기여했다(299쪽).

콩도르세는 …… 저명한 계몽사상가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혁명에 투신한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볼테르처럼 “편견, 불관용, 미신”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했고, 여성, 유대인, 흑인노예 같은 약자들의 권리를 지지했으며 ……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공화주의를 지지했고, 민주적인 헌법안을 만들었으며, 교육을 통해 평등사회를 건설하려 했다(301쪽).

당통은 1789년 인권선언에 명시된 권리의 평등을 넘어 “재산의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과격한 사회혁명 요구를 “불가능한” 요구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당통은 온건, 중도, 유화, 타협의 길을 선택했다(312쪽).

당통은 불신과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던 코뮌이나 무기력한 지롱드파보다 전쟁 수행 의지와 혁명적 통합의 열정을 상징했다. 당통은 임시행정위원회의 진정한 리더였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지롱드파였지만 전쟁을 수행한 것은 당통이었다. 미슐레에 의하면, 이 시기의 당통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통찰력 있는 혁명가”였다(314쪽).

11월 26일 당통은 파견의원들이 자행하는 공포정치를 고발했다. “우리는 배신자들을 끝까지 추적하되 실수와 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민중의 의지는 공포정치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공화국의 진정한 적들에게만 향해야 한다. 혁명적 열정이 부족한 사람을 죄인인 양 다루는 것은 민중의 의지가 아니다.”(327쪽)

로베스피에르는 전적으로 민중의 편에 섰다. …… 로베스피에르에게 민중의 폭력은 정당했다. 그것을 단죄하는 것은 민중을 단죄하는 것이며, 7월 14일의 민중폭력이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던 혁명을 단죄하는 것이었다(343쪽).

제헌국민의회 시기에 로베스피에르는 민중과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했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1791년 6월 무렵부터 로베스피에르는 ‘청렴지사l’incorruptible’라는 별명을 얻었다(349쪽).

로베스피에르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지 않고 이상과 원칙을 고수했으며 타협을 거부했다. 민중은 그의 원칙주의와 ‘청렴함’에 열광했으나 동료 혁명가들에게서는 지지와 우려가 교차되었다. 그는 시종일관 완전한 개혁을 요구했고, 그럴수록 그의 수사학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되어 적을 만들어내고 적의 음모를 고발하는 무기가 되었다. 1794년 7월 27일(열월 9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폭군’, ‘독재자’로 몰려 체포되었다(372쪽).

마라는 민중, 즉 빈자들과 약자들의 친구를 자처했으며 공화주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민중의 친구》는 제8호와 제9호(9월 18일과 19일)에 처음 쓴 사설에서부터 국민의회의 숙정을 요구했다. 주권자 민중은 ‘민중의 적’에게 저항하여 ‘정의’를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인데 그 구체적인 수단은 폭력과 학살을 넘어 ‘절멸’로 치달았다(379쪽).

코르데는 바르바루를 찾아가 만났다. 바르바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잔다르크가 없다면, 하늘이 보낸 해방자가 없다면, 프랑스는 끝장이다.” 코르데는 레날 신부의 책을 읽고 폭군 살해는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라 살해는 정당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국의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388쪽).

마라를 가장 잔인한 혁명가로 꼽는 데 역사가들 사이의 이견은 없다. 당통은 민중의 폭력 행사를 막기 위해 의회가 대신 폭력을 행사하자고 말했으나 마라는 민중의 직접 폭력을 촉구한 인물이었다. 마라는 전쟁과 반혁명으로 상황이 급박해짐에 따라 극도로 과격해졌고, 학살 대상도 처음에는 궁정, 의회, 교회, 군 같은 공식 기관의 공적 인물로 제한했으나 점점 모든 반혁명파, 모든 혐의자로 확대했다(406쪽).

버크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빛나는 프랑스의 왕정 체제가 혁명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보고 대중독재와 전쟁, 그리고 장군의 지배를 예견했다. 버크의 예언은 정확했다. 페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화주의 혁명을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 확산시키려 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비화되어 파국을 맞이할 것을 내다보지 못했다(443쪽).

미슐레는 …… 프랑스혁명에서는 빈곤문제나 사회문제보다 관념문제가 더 중요했다고 말한다. 혁명은 “결핍의 자식이 아니라 철학(계몽사상)의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의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빵집 앞에서도 사람들은 기근보다는 거부권, 미라보의 최근 연설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한다(459쪽).

민중은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옳다는 그의 민중관은 다분히 낭만적인 인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학살의 민중은 7월 14일의 민중이나 8월 10일의 민중과는 다른 민중이었다는 미슐레의 변론은 역사적이지 못하다. 민중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465쪽).

프랑스혁명이 미국혁명과 다른 경로를 취하게 된 것은 아렌트에 의하면 빈자들이 개입하여 사회적 평등을 요구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회혁명’을 위해 제시된 개념이 ‘행복’이다. …… 18세기에 ‘행복 추구’는 일종의 ‘강박 현상’이었다. ‘행복의 추구’가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제시된 것은 1776년 7월 4일의 미국 〈독립선언문〉이다(481쪽).

소불이 근대의 농민을 중세의 농노처럼 묘사한 것, 귀족의 특권을 과장한 것,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민중혁명의 폭력성에 대해 둔감한 것 등은 바로 이념적 편향성에서 나온 것이다(505쪽).

퓌레에게 있어서 상퀼로트의 무기는 폭력이었고, 그들의 행동은 “지나간 ‘황금시대’에 토대를 둔 고래의 유토피아와 연결된 반동적인 행태”였다. 상퀼로트의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프랑스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면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반부르주아 혁명이다(516쪽).

장클레망 마르탱의 전략은 ‘공포terreur’는 인정하되 ‘공포정치Terreur’는 부정하는 것이었다. 방데 전쟁에서 학살은 있었어도 제노사이드는 없었듯이, 공포는 있었어도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법적인 공포, 즉 ‘공포정치’는 없었다는 것이다(543쪽).

역사가는 이들을 포함하여 공포정치의 희생자를 3만 5,000명에서 4만 명으로 추산한다. 공포정치 기간에 감옥에 수용된 혐의자의 수는 50만 명으로 추산된다(570쪽).

이들이 원한 혁명은 ‘자유’의 혁명이었다. 반면에 …… 로베스피에르 같은 과격 혁명가들은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려 했으며, 의회제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소유권을 제한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재산을 분배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민중이 혁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평등’을 요구함에 따라, 버크가 우려한 “자연적 질서의 전복”이 벌어졌다(577쪽).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혁명, 그것은 순수, 선함, 독선, 위선, 오만, 광기가 용솟음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잔혹한 격전장이다. 혁명은 전쟁이고 폭력이다. …… 혁명은 미래를 위해 희망의 이념을 제시했지만 현실에서는 엄청난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578쪽).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머리말
고등학교 교과서의 ‘프랑스혁명사’|새로워진 프랑스혁명사 연구|혁명의 배신|혁명ㆍ혁명가ㆍ혁명사

연표

I. 혁명과 반혁명

1. 인권선언
세 헌법, 세 인권선언|1791년 헌법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콩도르세 헌법안과 산악파 헌법|열월파 헌법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자유와 평등의 드라마
2. 방데 전쟁의 폭력성
제노사이드 논쟁|반혁명 전쟁|양민학살|누구의 책임인가|혁명의 폭력성
3. 리옹 반란
혁명의 분열|지방의 저항|리옹 시민 봉기|혁명정부의 응징|연방주의 반란
4. 슈앙 반혁명 운동의 여러 모습
‘슈앙’의 등장|라로슈자클랭 후작 부인이 겪은 브르타뉴의 농민들|장 코트로 형제의 순교: “국왕과 종교를 위하여”|망명 귀족에서 슈앙으로: 클로드 오귀스탱 테르시에|불굴의 전사 조르주 카두달|제2의 방데 전쟁
5. 가톨릭교회의 수난
성직자시민법과 선서|선서거부신부 처벌법과 수난|탈그리스도교|‘열월 정변’ 이후|정교 분리
6. ‘열월 정변’과 공포정치의 청산
부적절한 개념, ‘반동’|로베스피에르의 몰락|공범자들|공포정치의 청산|부르주아 혁명으로의 복귀

II. 혁명가

7. 라파예트-세 혁명의 영웅
자유주의 귀족|미국 독립혁명 참전|“두 세계의 영웅”에서 “혁명의 배신자”로|1830년 혁명의 영웅|‘자유’의 혁명가
8. 시에예스 신부-혁명의 시작과 끝
신부에서 혁명가로|《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의 수사학|부르주아 혁명의 비전|보나파르트와 더불어 혁명에 마침표|의회주의자
9. 콩도르세-계몽사상가에서 혁명가로
투쟁적인 계몽사상가|입법의회와 국민공회 의원|불발로 끝난 민주적 헌법안|인류 진보에 대한 낙관|위대한 휴머니스트
10. 당통-구국의 영웅인가 부패한 기회주의자인가
왕실참사회 변호사|코르들리에 선거구의 투사에서 법무장관으로|“대담함, 또한 대담함, 언제나 대담함”|제1기 공안위원|단두대에 오른 관용파|실용주의적 혁명가
11. 로베스피에르-혁명의 수사학
루소의 사도|“민중이 주권자다”|“혁명은 끝나지 않았다”|“적은 우리 안에 있다”|덕과 공포|덕의 공화국| 타협을 거부한 이상주의자
12. 마라와 코르데-혁명의 두 순교자
“민중의 친구”|코르데의 결심|마라의 죽음|코르데 재판|자유의 순교자?|구국의 순교자?

III. 혁명사

13. 버크와 페인의 엇갈린 예언
증언과 논쟁|버크의 비관적 성찰|페인의 이상과 좌절|공포정치|증인이자 예언가였던 버크와 페인
14.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
혁명의 “소생”|민중과 엘리트|반혁명의 보루, 교회|반사회주의 역사학|낭만적 민중 인식
15. 한나 아렌트와 프랑스혁명
전체주의의 기원|공화주의적 자유|빈자들의 개입|‘행복’을 위한 사회혁명|정치문화의 차이|실패한 혁명, 프랑스혁명
16. 알베르 소불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
도시 민중에 주목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도식적인 ‘구체제 위기론’|부르주아 혁명에서 민중혁명으로|“자유의 전제專制”|편파성
17. 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공산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혁명의 궤도 이탈|혁명의 교리문답|환상의 과거|혁명사 연구의 정치적 전환
18. 장클레망 마르탱의 프랑스혁명 구하기
혁명과 폭력|폭력의 평범성|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가 아니다!|공포와 공포정치|로베스피에르를 위한 변명

맺음말
자유와 평등의 혁명|형제애|프랑스혁명의 희생자|혁명의 교훈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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