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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의 항해술 (보편과 특수 사이의 영화들)
비교의 항해술 (보편과 특수 사이의 영화들)
저자 : 하승우
출판사 : 오월의봄
출판년 : 2022
ISBN : 9791168730304

책소개

한 편의 영화가 자본주의와 조우할 때

한국이라는 사회의 모순과 적대를 번역해내는 영화적 순간들
그 충격과 긴장, 균열을 가로지르는 ‘비교’의 사유

한 편의 영화가 자본주의와 조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조우는 영화 내부에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까? 아니, 그 전에 영화와 자본주의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통상적으로 영화는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는 문화상품으로, 탄생부터 자본주의 시스템과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오늘날의 대규모 영화산업과 그 자장 안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대중영화들은 영화와 자본주의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선명히 보여준다.
《비교의 항해술》은 영화연구에 그러한 관계성에 대한 사유를 도입하는 책이다. 동시에 이 작업은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에 반응하는 문화적 형식인 대중영화를 통해 ‘한국’이라는 특정한 국가/사회의 모순과 적대를 포착하고 역사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와 그 체제에 내재한 사회적 적대들이 영화의 표면적인 내러티브를 넘어,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들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산포된다는 것을 강력히 염두에 둔다. 이때 비평의 과제는 한 편의 영화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적대를 어떤 식으로 번역하고 표현해내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데 있다.
물론 대중문화로서 영화는 때로 정치, 경제 등 다른 사회적 실천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역사적 모순이 응축되고, 자본과 국가의 폭력이 극으로 치닫는 사회적 상황에 ‘부인’이나 ‘침묵’의 방식으로 응답하는 영화들이 결코 적지 않듯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인은 반드시 역사적 조건에 관한 흔적들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여러 요소들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방식, 즉 텍스트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에 초점을 맞추는 ‘징후적 독해’다. 그런 징후들을 포착할 때 우리는 영화 텍스트 내부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파열들을 생산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비교’라는 출발점: 이론적 자원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비교’는 그러한 징후적 독해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비교란 영화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을 견주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책에서 저자는 한 편의 영화에 부재하는 것이 다른 영화에 어떻게 현존하는지 살펴봄으로써 부재와 현존의 ‘성좌적’ 관계를 조명하는 작업, 혹은 서로 다른 영화들이 맺고 있는 비대칭적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영화가 처한 역사적 조건들을 일별하는 것을 비교로 지칭한다. 이뿐만 아니라 비교는 “보편과 특수의 비교, 독특성과 종별성의 비교, 한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비교, 한 편의 영화와 또 다른 영화의 비교” 등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같은 맥락에서 부제 ‘보편과 특수 사이의 영화들’은 영화, 좀 더 정확히 말해 한국영화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과 문제의식을 담아낸다. 그 관점이란 바로 ‘보편the universal-특수the particular’라는 대당관계 속에서 한국영화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이 대당관계는 한국영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하기 위한 문제틀을 제시한다. 보편-특수란 기본적으로 생물학의 분류체계처럼 상위 범주와 (그에 포함되는) 하위 범주 사이의 관계를 뜻하며, 흔히 상위 범주인 보편(유)이 하위 범주인 특수(종)을 포함한다고 상정된다. 헤겔로 대표되는 고전철학의 대주제인 ‘전체-부분’과도 맞닿아 있는 이 관계는 주디스 버틀러ㆍ에르네스토 라클라우ㆍ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현대의 좌파 정치철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였다.
저자는 그러한 좌파 이론가들의 보편-특수 논쟁을 면밀히 검토하면서도(4장), 그 관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며 ‘한국영화’라는 영역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소환되는 철학자는 루이 알튀세르다. 자본과 노동의 기본모순이 특정한 사회구성체의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과잉결정’되는 방식에 주목했던 알튀세르의 작업들은 한국/남한이라는 특정 사회구성체, 그리고 그 자장 안에서 생산된 대중영화들이 자본주의와 조우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데 핵심적인 단초가 된다. 이는 곧 종별성의 문제로, 종별성 개념은 특정한 사회구성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심급들이 불균등하게 맺고 있는 모순의 관계를 지시한다.
유령적 보편성(버틀러)이나 구체적 보편성(지젝) 같은 개념들이 시사하듯, 보편과 특수는 언제나 내재적이면서도 동시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하나의 단일한 원리로서의 보편성이 다양한 특수(자)들을 포함하지 않을뿐더러, 특수들이 그에 종속되지도 않는다는 통찰은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양자의 관계를 동시적으로 만드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 계기는 특수가 변화/전화하는 순간에 열린다. 저자는 특수가 변모하는 계기를 독특성과 종별성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특수의 형태 변화가 보편의 개념 자체를 발본적으로 재구성하고 복수화한다고 강조한다. 복수의 개념들이 서로 경쟁할 때 보편 개념은 확장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는 특수가 ‘종별성’으로 전화될 때 마련된다. 그때 우리는 영화를 역사의 구체적인 작동들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곧 영화의 사회문화적 종별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해준다.

‘영화’가 아닌 ‘한국영화’를 질문한다는 것: 종별성의 관점과 비교영화연구
말하자면 종별성(특정성)은 ‘관계’와 관련된 개념으로, 관계성 자체를 뛰어넘어 근본적으로 ‘자기-개체화’를 추구하는 독특성과 달리 ‘개체와 환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종별성의 측면에서 보편 개념은 역사적 자본주의를, 특수 개념은 한국영화를 가리키며, 이때 중요한 것은 한국영화가 역사적 자본주의와 그것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시간성들과 조우하는 방식을 더듬어보는 일이다.
영화연구에 종별성의 축을 도입하는 시도는 곧 영화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의 형태를 전환하는 일이다. 동시에 이것은 이미지가 지닌 고유한 역량에 집중함으로써 영화를 독특성의 측면에서 조명한 들뢰즈의 영화이론에 존재하지 않는 축이다. 그러나 종별성의 관점을 견지할 때 우리는 ‘영화 그 자체’가 아닌, ‘한국영화’를 질문할 수 있게 된다. 이때 한국영화란, 한국이라는 특정한 사회와 그 사회가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관계 안에서 생산되고 또 그것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부대끼는 문화 텍스트/생산물을 말한다. 이러한 접근은 하나의 보편으로서의 영화, 즉 특정 국가/사회의 역사적·사회적 맥락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매체 형식으로서의 영화 개념 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복수의 영화 범주들을 산출해낸다.
《비교의 항해술》은 이 문제를 가장 급진적으로 사유했던 영국의 영화이론가 폴 윌먼Paul Willeman에게 주목한다. ‘비교영화연구’를 위한 조건과 이론적 자원을 탐색하는 그의 작업들은 문학뿐 아니라 영화에도 왜 ‘비교의 방법론’이 필요한지 세밀히 짚어낸다. 무엇보다 윌먼은 문학이론가 프랑코 모레티가 비교문학연구의 기본적인 문제틀로 제시하는 ‘외부적 형식 vs 지역적 소재’라는 개념쌍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대립 구도 대신 필요한 이론적 토대는 “한 지역에서 생산된 문화 텍스트가 자본주의와 조우하는 과정”이다. 자본주의적 경험을 비교영화연구의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문화적 차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는 “필연적으로 산업화된 문화적 형식”으로, 그 형식에 영향을 주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역학을 단순히 ‘외부적 형식’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더불어 이런 관점은 특정 민족국가에서 발생한 문화적 형식을 자본주의 자체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할리우드를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며 할리우드와 그 외 내셔널 시네마national cinema들을 대당관계로 설정하는 실수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그 자체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니다. 윌먼은 “지역적으로 종별적인 자본주의와의 조우”라는 전혀 다른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서구 vs 비서구’의 대당관계를 무효화하고 서구/할리우드를 지역화한다.
결국 한국영화를 비롯해 각각의 내셔널 시네마의 윤곽을 그릴 때 핵심은 “중심과 주변의 불균형적이고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체계의 문제”다. 윌먼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서구 역시 이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시간성으로 상정되어온 서구의 근대조차 “자본주의 근대화와 지역의 타협 사이에서 형성된” 매우 지역-특정적인 결과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아시아 상상: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영화적 응답
세계체계적 관점에서 자본 축적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순환한다. 조반니 아리기는 이를 ‘체계적 축적 순환’으로 개념화하며 그 순환이 ‘국가 간 체계’와 긴밀히 얽혀 있다고 지적한다. 즉 자본 축적은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노바·네덜란드·영국·미국처럼 특정한 헤게모니 국가 내부에서 구성되어 전 세계적으로 팽창”한다. 기본적으로 자본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무한히 이동하고 확장하는 특징이 있지만, 그런 자본조차 “특정한 사회구성체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일례로, 1960년대 동아시아의 다층적 하층체계가 확립된 데는 1950~1960년대 일본 자동차 산업에서 최하층 노동자들의 노동 교섭력이 증대된 실질적 배경이 있다. 국내 하청체계를 구성하는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증가하자 이를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저임금 노동력을 동원해 해결하려 한 것이다.
냉전 질서 아래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층적 하층체계는 20세기를 주도한 미국 헤게모니(‘장기 20세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1950~1960년대 남한은 미국 헤게모니가 주도하는 동일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일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이러한 차이는 “모순이 종별적으로 펼쳐지는 양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 시기 일본이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경제발전에 몰두할 수 있었다면, 남한의 국가체계는 냉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분단과 한국전쟁을 경험하며 그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특히 1952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냉전의 소용돌이에서 물러날 수 있게 된 일본은 제국으로 군림했던 과거를 망각하고, 미국의 지원하에 스스로를 단일민족국가로 정비해나간다. 반면 이 조약에서 배제된 남한은 냉전 질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기와 냉전기를 거치며 영토가 확장과 수축 사이에서 진동하는 사이, 한국의 아시아 상상은 태평양을 중심으로 재조직화된다.”
이렇듯 세계체계에 대한 응답은 두 국민-국가의 아시아 상상력에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 시기 제작된 일련의 영화들은 한국(남한)과 일본이 세계체계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이질적인 방식으로 아시아를 상상하고 있음을 선명히 보여준다. 특히 앞서 살펴본 폴 윌먼의 비교영화연구 방법론은 그 양상을 식별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원들을 제공하며, 저자는 그 방법론을 토대로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한국영화와 1960년대에 제작된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들을 대상으로 비교영화연구를 수행한다(2장). 그 영화들 내부에 등장하는 모종의 공간들은 두 국가가 표상했던 아시아의 심상지리imagined geography를 나름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먼저 저자는 확장(해방기)과 수축(냉전기) 사이에서 진동했던 남한의 영토 상황을 반영하는 당대 한국영화들에 주목한다. 〈산불〉(1967), 〈고발〉(1967), 〈생명〉(1969), 〈속 팔도강산: 세계를 간다〉(1968), 〈04:00-1950〉(1972) 등이 바로 그 영화들이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도시들을 확장적 순환의 방식으로 연결하는 〈고발〉과 〈속 팔도강산〉은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태평양의 지리적 커넥션을 선명히 표현한다는 점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한다. ‘조국 근대화’의 구호를 해외로까지 확장하면서도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비동맹 중립국들에 상당히 적대적이었던 남한의 지리적 상상이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산불〉 〈생명〉 〈04:00-1950〉의 경우, 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꾀한 앞의 두 영화와 상반되는 전략을 취한다. 시골 촌락, 탄광, 고립된 벙커 등 꽉 막힌 폐쇄 공간과 인물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밀도 있게 담아냄으로써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파’하는 선택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위의 한국영화들과 견주어지는 1960년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들은 폐쇄 공간이라는 동일한 전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주인공 오카네의 행위를 통해 제국주의적 확장을 급진적으로 파열시키는 급진적 단절을 가시화한 〈세이사쿠의 아내〉 〈나카노 스파이 학교〉 이후, 그의 영화(〈문신〉 〈눈먼 짐승〉)는 점진적으로 그 어떤 구체적 지표도 없는 폐쇄 공간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런 경향을 출구 없는 파시즘/제국주의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하거나, 지구상의 모든 공간이 동질화되는 포스트모던한 경향의 영화적 선취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이어도 상관없는 탈맥락화된 공간을 제시하며 사회적 관계와의 연결선을 완전히 끊어버릴 때,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들이 그리고자 했던 “제국주의적 팽창과 그 팽창의 힘을 단절시키려는 힘 사이에서 발생하는 환원 불가능한 긴장”은 오히려 사라지게 된다.
초국적 시대의 한국영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탄생과 〈괴물〉이라는 급진적 예외
그렇다면 국민-국가의 형성 이후 한국영화는 어떤 궤적을 그리며 변화해왔을까? 1990년대 후반부터 2022년 현재까지, 한국영화는 놀라운 변화를 거듭해왔다. 천만 관객 시대를 열 만큼 국내 영화 시장은 대단히 큰 성공을 거뒀으며, 해외 진출이나 국제영화제 수상 소식도 꾸준히 증가했다. 이런 성적들은 한국영화가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들을 생산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의 근거가 된다. 실제로 일부 해외 평론가들은 한국영화가 민주화 사회에 조응하며 새로운 흐름을 선보였다며 ‘뉴 코리안 시네마’라는 명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교의 항해술》은 이런 식의 목적론적 사고에 매우 비판적이며, 한국영화에 대한 새로운 문제 설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선 저자는 한국 영화산업의 변화 시점을 1990년대가 아닌 노동자대투쟁이 발생한 1987년으로 설정한다. 1987년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형식적 포섭’에서 ‘실제적 포섭’으로 이행하게 되고, 노동의 본성 자체도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형식적 포섭이 자본과 노동의 분명한 구별을 전제한다면, 실제적 포섭 국면에서는 테크놀로지가 도입되면서 자본이 노동력을 분할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1980년대 말 한국영화 산업 역시 실제적 포섭 단계에 들어섰으며, 그에 따라 영화 제작은 물론 투자, 제작, 배급, 관람 등 전 영역에 걸친 합리화 경향(대기업의 프로듀싱)이 진행되었다. 대기업(삼성물산)이 영화 제작에 뛰어든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기획영화’ 〈결혼 이야기〉(1992)는 그 대표적 사례다.
로컬리티를 서사의 주된 요소로 활용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출현도 의미심장한 변화다. 이러한 형식은 사실상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테크놀로지 도입)로 인해 이윤율이 저하된 상황에서 그 저하 경향을 상쇄하기 위해 자본을 개입시키려는 시도”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별 영화의 내적 논리가 이런 식의 산업 논리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영화가 자본주의 논리와 동시적이면서도 비동시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상대적 자율성’)을 염두에 두고 영화의 내적 논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동학을 사유할 필요가 있다.
봉준호의 〈괴물〉(2006)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범주에 급진적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다. 저자에 따르면, 〈괴물〉의 급진성은 로컬리티의 소재(주한 미군의 포름알데히드 방류라는 역사적 사건)를 인용함으로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지역화했다는 점에 있지 않다. 그보다 〈괴물〉은 그 지역적 소재/차이, 즉 하나의 특수를 자신의 비-동일성/근본적 실패로서의 공백과 마주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급진적이다. 영화는 표면적인 내러티브 논리상 배제되는 하나의 기이한 쇼트(매점에서 ‘강두’가 조는 모습)를 배치함으로써 괴물에게 납치된 ‘현서’가 납치된 순간 이미 죽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암묵적인 배열은 관객으로 하여금 괴물의 외상적 침입에 한마음으로 대처하는 가족들의 서사 대신, 가족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파국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만일 트라우마적 계기가 현서가 괴물에게 납치되는 순간부터 발생했다면, 〈괴물〉의 후반부는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을 반복함으로써 주체가 스스로를 보상redeem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실패한 시도들의 반복을 통해, 과거가 그 가능성 속에서 ‘열리게’ 된다면, 영화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트랜스내셔널과 내셔널 사이의 긴장들: 초국적 작가로서 박찬욱이라는 사례
박찬욱의 영화들은 글로벌-로컬 혹은 트랜스내셔널-내셔널 범주와 관련해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박찬욱은 봉준호와 함께 세계 시장에서 각광받는 ‘초국적 작가’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 내재한 적대를 자신만의 굴절된 방식으로/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내왔다. 알레고리는 역사성과 대면하는 하나의 급진적인 방식으로, 관객들은 그의 영화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역학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박찬욱에 대한 내셔널적인 차원의 독해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박찬욱의 영화들은 이전보다 더욱더 트랜스내셔널리즘을 향한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그의 영화를 내셔널 혹은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로 기계적으로 분류하는 것보다, 그 영화들이 트랜스내셔널의 경향 속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상실하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트랜스내셔널 시네마와 그 경향성에 대한 강조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는 내셔널 시네마 범주를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다. 초국적 신자유주의 시대에 내셔널의 문제를 탐구한다는 것은 일견 시대착오적인 전략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시대착오의 감각을 끝까지 견지하는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우선 트랜스내셔널, 즉 초국적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문화 혼종성과 유동성이 그 자체로 급진적인 비평 담론과 연결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짚어야 한다. 핵심은 내셔널 시네마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내셔널 시네마를 특정 국가의 경계 내에서 생산된 영화들을 지칭하는 고정된 범주로 설정하는 대신, 그 경계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살피는 시도가 필요하다. 즉 내셔널 시네마를 분류 체계로 고정화하지 않고 한 편의 영화가 어떠한 순간에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사회-정치적 종별성을 발화하는지 포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내셔널에 대한 사유를 확장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네이션적인 것the national으로의 전화’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종별적 측면에서 ‘네이션적인 것’을 제시하는 경향은 초기작들에서 비교적 분명히 나타난다. 예컨대 〈공동경비구역 JSA〉(2000)는 네이션nation이 반드시 국가로 환원되는 단위가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민족-국가’에 붙는 하이픈(-)이 매우 임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임을 상기한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분단 문제를 다룬다면, 〈복수는 나의 것〉(2002)은 계급 문제를 전면화한다. 이 영화에서 박찬욱은 장르적 상상력과 관습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말하는 잉여가치의 발생을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사적 복수의 무한한 연쇄로 비춰질 수도 있는 복수의 과정은 자본과 노동의 등가교환 관계에 존재하는 부등가교환의 비대칭성을 겨냥한다.
그러나 최근작인 〈헤어질 결심〉(2022)이나 〈아가씨〉(2016)에서 한국사회의 역사성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은 점차 희미해진다. 〈아가씨〉는 섹슈얼리티를 가부장 체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서 다루기보다 욕망의 대상을 하나 더 추가하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헤어질 결심〉은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개방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는 존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욕망의 대상에 집착하는 〈아가씨〉와 분명히 구별되지만, 영화가 직접적으로 참조하는 ‘이주의 여성화’라는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때 “참을 수 없는 적대로 이루어진 동시대의 사회적 관계를 지나치게 심미화된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한계가 있다. 즉 영화는 ‘경계를 넘나들고 허무는 삶’을 보여주려 하면서도, 항상 이미 ‘경계 위에 있던’ 위태로운 소수자(이주 여성)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 적대와 폭력에 대한 질문들을 예리하게 벼려내지는 않는다/못한다.
그 이유는 글로벌 영화제 네트워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헤어질 결심〉 〈브로커〉 〈기생충〉 등 CJ ENM이 투자와 배급을 맡은 영화들이 최근 몇 년간 칸에서 연이어 수상한 사실을 상기하면, 그러한 영화적 선택이 어떤 배경에서 이뤄졌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글로벌 영화제 네트워크의 밋밋한 순환 회로 속에서 상실되고 마는 것은 영화 앞에 놓인 세계, 곧 역사적 자본주의를 기입하는 영화의 역량”이다. 이것이야말로 박찬욱의 영화가 점점 더 초국적이 될수록 상실할 수밖에 없는 지점일 것이다.

포스트-정치 시대의 공포 스펙터클: 무력한 인민의 재현
재난 혹은 재난 자본주의는 한국영화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이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들은 다양한 수준의 재난과 공포의 양상을 포착해왔다. 그러나 대다수 영화의 재난과 파국에 관한 상상력은 여전히 남성 주체의 희생적 자살과 자기 연민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다. 한국영화가 반복적으로 상연해온 이 자기 희생적 제스처는 “서사적 해결을 무한히 유예함으로써, 사회적 적대의 장을 여는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한국영화는 지속적으로 타자를 발명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타자와의 대면을 회피함으로써 대중영화가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적대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실종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거대 서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삶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포스트-정치 개념에서 정치는 단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로 축소된다. 동시대의 수많은 매체 이미지가 공포, 파괴, 손상된 신체와 사지 절단 같은 ‘공포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데 열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정치가 행정과 치안으로 축소되면서, 공포는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정치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가장에 대한 열정이 들어선 것이다. 지젝은 현실이 점점 더 ‘실재 없는 현실IRREAL reality’로 변하고 있다는 진단으로 이러한 경향을 설명한 바 있다. 사이버 공간이 모든 것을 경험하도록 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은 ‘경험의 축소’에 가깝다. 실재를 경험할 수 없는 현실은 가장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진다. 즉 사람들은 훨씬 더 자극적인 것에 대한 간접적 체험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실재와 실재 자체에 내재된 공포는 결코 우리가 의식적으로 욕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실재와의 조우를 억지로 발생시키려고 강제하려 할 때 실행되는 것은 다름 아닌 ‘테러’/‘테러 이미지’이다.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을 참조한 〈추격자〉(2007)는 그야말로 실재를 강제하는 전략으로서 가장에 대한 열망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영화다. 극중 연쇄살인범 ‘지영민’의 피해자 ‘김미진’의 신체는 스펙터클적으로 전시된다. 영화는 미진을 시종일관 ‘벌거벗은 생명’으로 가시화한다. ‘미진’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웃는 아이(미진의 딸)의 인서트 컷을 매개로 연결하는 방식 역시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결국 이 컷의 목적은 무력한 인민의 고통을 전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추격자〉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스펙터클은 실상 우리가 방송 매체와 뉴스 보도를 통해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는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사실성factness과 사물성thingness에 대한 강박적 집착과 열망이야말로 우리 시대 스펙터클의 핵심이 아니던가?
파국과 재난의 이미지들이 ‘숭고’의 논리를 띠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숭고란 우리가 파국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가급적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목격할 때 가능한 감응의 양식이다. 말하자면 숭고 이미지는 “참사가 벌어진 현장(혹은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 사이의 일정한 거리/경계를 상정한다. 그 경계선을 넘어 타자에게 공감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성 주체의 자기 희생과 같은 한국 재난영화의 장르 관습을 어느 정도 탈피한 〈엑시트〉(2019) 역시 그러한 숭고의 논리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영화에서 (재난이 벌어지고 있는) 저곳과 (그렇지 않은) 이곳 사이를 중계하는 것은 SNS, 유튜브, 드론 등 최첨단의 시각 테크놀로지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중계는 “재난이 초래한 사회적 긴장을 ‘집단지성’이라는 미명하에 손쉽게 해결하려는 정치적 시도로, 재난에 응축된 사회적 적대를 포착하기 어렵게” 만들며, 세대 문제를 불안정노동 개념과 결합시켜 제시하는 충분한 장점을 무력화한다. 적/타자의 형상을 가늠해보는 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불안을 변곡시켜 적대가 드러나는 경로를 우회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엑시트〉는 사회적 적대의 문제를 밀어붙이는 대신,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협력적 소통 네트워크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택한다.
물론 이것이 비단 〈엑시트〉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의 한국영화는 이처럼 적/타자와 직면함으로써 문제의 근원을 직시하는 대신, 여전히 탈출과 생존만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문제 해결을 끊임없이 유예하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엑시트〉가 우리 사회가 처한 재난의 양상을 반영하면서도 그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가능성, 즉 유토피아적 충동을 제시하는 방향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서문
한국영화를 이해하는 실타래: 독특성과 종별성 ㆍ5

1장 근대의 시간 ㆍ26
: 1950~1960년대 한국영화의 지정학

2장 비교영화연구의 질문들 ㆍ68
: 영화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계

3장 알튀세르라는 유령들의 귀환 ㆍ114
: 노동 다큐멘터리 영화와 종별성

4장 경험적 역사와 비역사적 중핵 사이의 긴장 ㆍ158
: 〈괴물〉이라는 급진적 예외

5장 (트랜스)내셔널 시네마에서 ‘네이션적인 것’으로 ㆍ196
: 초국적 작가로서 박찬욱이라는 사례

6장 장르적 상상력의 실패 ㆍ 232
: 현재주의와 역사 기록의 문제

7장 포스트-정치 시대의 재난과 공포 ㆍ 258
: 한국영화의 정치적 상상력

초출 일람ㆍ301
찾아보기ㆍ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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