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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저자 : 손정목
출판사 : 한울
출판년 : 2019
ISBN : 9788946066519

책소개

한국전쟁 이후 현재의 모습이 있기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에 대한 증언

서울시의 공간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66년부터 1980년까지의 15년간이었는데, 지은이는 격변하는 시기의 한가운데-1970년부터 1977년까지-서울시에서 도시계획국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난무하는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배경, 즉 도시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입안되고, 수정되고, 시행되는 과정과 뒷이야기를 엮었다. 서울시 최초의 도시계획 수립에서 최근 수서사건의 전말까지 신문, 국회속기록, 용역보고서, 재판소판결문 등의 자세한 자료 인용을 통한 고증과 관련인물에 대한 얘기, 비사까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불쾌해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저자는 오직 귀중한 역사이기 때문에 충실하게 후세에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써내려갔다. 7년간 23꼭지, 200자 원고지 7,200여 매의 방대한 분량으로 집필하면서 작업 막바지에 위암 수술도 한 차례 받았고, 교통사고도 있었다. 23꼭지 중 19꼭지는 국토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월간≪국토≫에 1996년 5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연재했던 내용이다. 군살을 뺀다고 했는데도 방대한 분량이다. 서울시나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부처에서처럼,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은 역사의 충실한 전달자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도쿄의 도시계획 120년의 역사를 ‘바람기가 전혀 없는 날의 남해바다’로 비유한다면 서울의 도시계획은 ‘태풍을 맞은 부산 앞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격동의 서울 50년을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재조명하여 오늘날의 도시 구조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증 유발과 함께 해답을 제시해준다. 그 내용을 여기에 요약해본다.

한국전쟁과 서울의 피해
서울에서만 9만 5천 명 이상 사망?학살?납치?행방불명되었다. 보통의 사망이 2만 9,628명, 학살이 8,800명, 납치가 2만 73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일반주택의 피해 연건평 182만 358평, 서울시청 청사는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내부는 거의 파괴 소실되었고, 당시 9개 구청 중 3개 구청은 본관이 완전 파괴, 나머지는 모두 반소파, 277개 동사무소 중 62개는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나머지 215개는 모두 반소파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인적 피해와 함께 중요한 문화재의 피해를 눈앞에 두고 있던 서울은 주일대표부 김용주 공사의 노력으로 그나마 문화재의 폭격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워커힐 건설-군사정권 4대 의혹사건의 하나
1961년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과 김종필 정보부장의 대화를 발단으로 미군장병 3만 명의 휴가 유치를 위해 건설된 워커힐. 사단법인 워커힐이 60억 환으로 출발하여 1962년 1월 5일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나 토목공사는 그보다 앞서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4대 의혹사건 국회 감사로 1961년 9월부터 1962년 2월까지 각 군 공병감 휘하 각종 장비를 동원하고 연인원 2만 4,078명을 무상노역케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가 워커힐 건설 비용과 관련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모두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19만 평의 부지 중 사유지는 얼마나 되었으며 그 매수대금은 얼마였던가, 국유지?시유지는 자동적으로 워커힐 소유로 전환되었는가. 둘째 건축위원 및 기타 자문위원?고문 등에 대한 사례는 어떻게 얼마나 지급되었던가. 셋째 삼환?대림?동아 등의 건설회사와는 어떤 조건으로 시공계약이 이루어졌던가. 군장병의 노임은 무상이었겠지만 이들 시공업체가 어느 부분까지 자체 노동력을 동원했던가. 넷째 개관준비 요원 다수를 일본에 파견, 사전교육시켰는데 그 비용도 6억 4천만 원 중에 포함되었던가.

박흥식의 남서울 신도시계획안 전말
화신백화점, 그 후신 신신백화점 등 유통업으로 이 나라 최고의 부를 축적한 박흥식이 신도시계획을 처음 구상한 때는 화신백화점에 화재가 나던 1935년 봄이었다. 일제하에서 불광-수색 도시계획안을 수립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서, 육군 소장 이주일이 “수도 서울 인구증가에 대비한 주택건설계획을 구상해보라”는 과제를 하나 주었는데 그것이 후일 ?남서울 도시계획사업 인가신청서?가 되었다.

새서울 백지계획, 도시기본계획과 8?15전시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불쑥 “인구 150만 명을 수용하는 새 행정수도를 만들어내겠다”는 말을 내뱉은 것은 그가 시장으로 부임한 지 약 50일이 지난 1966년 5월 27일이었다. 김 시장은 8월 15일을 기해서 도시계획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마련해야 할 것이 새서울 백지계획과 도시기본계획이었다. ‘4천만 평 정도의 넓이와 상주인구 100만 내지 150만 명 규모, 그리고 도시의 외곽을 무궁화형으로 해달라’는 것이 새서울 백지계획의 작업 조건이었다. 이 그림의 작가는 1992년인가 93년에 밝혀졌는데 바로 저자와 허물없이 지내던 박병주였다. 그는 이 그림이 당시 엄청난 언론의 비판을 받아 부끄러움이 앞서 비밀에 부쳤다고 회술했다. 또한 도시기본계획안에 대해서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고무풍선”이니 “기술?과학성은 전혀 생각도 않고 세워졌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으나 저자는 그것이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둘째 이 계획에서 처음으로 도심부재개발이니 고도지구?미관지구니 하는 개념이 도입되고 일반에 공개되었다는 점, 셋째는 불완전하나마 20년 장기계획이라는 것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을 평가한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한국전쟁과 서울의 피해
1. 7월 16일 용산폭격과 김용주 공사
2. 세기의 대도박-인천상륙작전
3. 1.4후퇴와 서울의 파괴
4. 만신창이가 된 서울

서울시의 전쟁피해 복구계획
1. 대한민국 최초의 도시계획가, 장훈
2. 서울시의 전쟁피해복구
3. 시가지 고층화의 꿈-1953년의 건축행정요강

워커힐 건설-군사정권 4대 의혹사건의 하나
1. 베일에 싸인 워커힐 건설과정
2. 호화로운 워커힐의 적자운영
3. 워커힐이 미친 파급효과

박흥식의 남서울 신도시계획안 전말
1. 기업가 박흥식과 불광­수색 신도시계획안
2. 남서울 신도시계획안
3. 계획 좌절의 과정

새서울 백지계획, 도시기본계획과 8.15전시
1. 새 행정수도 건설계획
2. 서울시 도시기본계획
3. 계획의 발표와 평가
4. 8.15전시

아 ! 세운상가여-재개발사업이라는 이름의 도시파괴
1. 방공법에 의한 소개도로
2. 세운상가가 들어서기 이전의 사정
3. 종묘 앞­대한극장 간 재개발계획
4. 설계에서 건축까지
5. 짧았던 영광, 퍼부어진 비난
6. 아! 세운상가여-앞으로의 운명

한강종합개발-만원 서울을 해결하는 첫 단계
1. 1950~60년대의 서울과 한강
2. 한강종합개발계획
3. 한강개발과 강변도로
4. 한강제방공사로 조성된 택지지구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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