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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BC508-AD415)
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BC508-AD415)
저자 : 마이클 스콧
출판사 : 사계절
출판년 : 2018
ISBN : 9791160943818

책소개

같은 시기에 존재한 다른 문명들, 그 연결성을 파헤치다!

세계의 여러 문명들이 서로를 향해 눈을 돌리고 발을 뻗어나가던 기원 전후 천년을 거치며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의 세계로까지 이어졌는지 살펴보는 『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종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명 간의 상호 연결을 중심으로 고대 세계의 정치와 전쟁,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다.

1부에서는 기원전 6세기 말의 아테네, 로마, 그리고 중국 노나라를 무대로 그곳에서 발생한 정치사상과 통치 방식의 혁명에 초점을 맞춘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로마에서 공화국이 발달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한 탁월한 개인이 군주에게 새로운 정치사상과 통치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사상가 공자의 이야기이다. 비록 그의 사상은 생전에는 위정자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하였지만 결국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상으로 도약하게 된다.

2부의 주요 무대는 기원전 3세기 말의 동양과 서양 전체를 가로지르는 전쟁터이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서 권력의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젊은 통치자들이 등장했다. 3부에서는 마침내 연결된 고대 세계에서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면서 발생한 종교적 변화와 혁신을 다룬다. 기원전 1세기를 지나며 제정으로 돌아간 로마가 지배하는 지중해 및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수용되기 시작했을 때, 힌두교는 인도의 굽타왕조 치하에서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었다. 한편 중국으로 전파된 불교는 5호16국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 공식 종교의 위상을 획득해나갔다. 이처럼 민주주의와 제국, 젊은 통치자들과 전쟁, 그리고 세계 종교의 전파까지 신화와 환상을 넘어, 역사로 이어지는 연결된 고대 세계들을 만나볼 수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고대 세계의 경계를 유라시아 전체로 확장시킨 마이클 스콧의 화제작
“이 책은 인류의 제도와 사상, 그리고 상상이 현실화된 역사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_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저자

우리는 지중해,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를 비롯한 세계 각 지역에서 출현한 문명에 관한 지식을 축적했고, 이 모든 것을 학교와 대학에서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분야가 마치 유일한 고대 세계인 양 그 안에 매몰되어 있었다. 세계 어디에서나 역사학자 집단은 같은 시기에 존재한 다른 문명을 살펴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그 연결성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조차 자신의 세계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우리는 글로벌 공동체에 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쓰고 읽을 때는 과거가 연결되지 않은 개별적인 뭉치인 양 취급한다. 이제 더 큰 그림을 보면서 하나의 ‘고대 세계’가 아니라 연결된 고대 세계‘들’을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
_서문에서

민주주의와 제국, 젊은 통치자들과 전쟁, 그리고 세계 종교의 전파까지
신화와 환상을 넘어, 역사로 이어지는 기원 전후 1000년의 새로운 발견!

인류라는 모험가 집단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한 시대,
세계의 여러 문명들이 서로를 향해 눈을 돌리고 발을 뻗어나가던 기원 전후 1000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종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명 간의 ‘심플로키symploke(상호 연결)’를 중심으로 고대 세계의 정치와 전쟁,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저자는 고대 문명(특히 그리스, 로마, 중국)에 관한 오늘날의 비교 연구가 무역이나 철학 등의 특정한 주제에 국한되어 있음을 비판하며, 비슷한 시기에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된 다양한 문화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음에 주목한다. 저자는 각 문명이 국가와 개인의 권력을 조정하며 정치체제를 완성시킨 기원전 6세기 말, 권력의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확장된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각국이 분투하던 기원전 3세기 말, 통치자의 권력과 종교가 결합된 기원후 4세기 초의 로마사, 중국사, 인도사, 중앙아시아사를 ‘세계사Universal History’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어낸다. 이를 통해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흥미로운 상상―이를테면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의 만남이나, 로마 군단과 한나라 군대의 전투 등―으로 치부되던 고대 세계가 기원 전후 천년을 거치며 실제로 어떻게 연결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의 세계로까지 이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과거는 죽지 않는다. 실은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말)
● 기원전 6세기 말, 국가의 위기에 무엇으로 대처할 것인가? 정치의 탄생

1부 ‘축의 시대의 정치’는 기원전 6세기 말의 아테네, 로마, 그리고 중국 노나라를 무대로 그곳에서 발생한 정치사상과 통치 방식의 혁명에 초점을 맞춘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라는 급진적 정부 형태가 출현하고 로마에서는 공화정체제가 탄생한 바로 그때, 중국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국가 운영 및 인간의 상호작용 방식에 관한 정치철학을 주장하며 나타났다.
기원전 508년 봉기한 아테네의 시민들은 참주 이사고라스를 도시에서 몰아내고 모든 시민이 국가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정치 혁명에 성공했다.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치체제가 세계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순간이다.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제국의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을 막아내며 더욱 강화된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왕의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에 상륙했을 때 아테네 민주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으나, 아테네의 시민계급으로 조직된 ‘호플리테Hoplite(중장보병)’가 활약하여 얻은 승리는 아테네 군사조직을 재편한 신생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감을 한층 북돋웠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은 값비싼 말을 보유한 귀족이나 두꺼운 갑옷을 마련할 재력이 있는 유산 시민층이 아니라 온전히 트라이렘의 노를 잡은 남자들의 힘으로 승리했던 살라미스 해전이었다. … 이후 ‘데모크라티아’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고 아테네 정체의 진화가 가속화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_84쪽

기원전 510년, 로마의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폐위되었다. 기원후 1세기 말에 활동한 역사가 타키투스는 당시의 상황을 『연대기Annals of Imperial Rome』의 첫 문장에 “로마는 창건 이래 줄곧 왕이 다스렸다. 브루투스는 자유(리베르타스libertas)를 확립했다”라고 적었다. 혁명을 이끈 인물을 훗날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선조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이후 로마는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하고 오늘날 ‘공화국republic’의 원형인 ‘레스 푸블리카 로마나res publica romana’ 체제를 구축했다. 새로운 체제 아래에서 로마는 향후 100년간 주변 부족을 복속시키고 세력을 확장한 끝에 기원전 5세기 초에는 이탈리아반도 안에서 가장 크고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로마가 지배계급과 민중의 권력을 조정하는 단계에서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연구했다는 점이다.

로마 사절단은 스토아 바실레이오스에 새겨진 150년 된 솔론의 법전에 주목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찬했던 솔론의 ‘중도’를 강조하는 절충안과 ‘에우노미아(질서)’ 원칙은 기원전 454년의 로마에 유용한 해결책으로 다가왔다. 후대의 연설가 키케로는 솔론의 개혁을 ‘콩코르디아 오르디눔Concordia ordinum(계급의 화합)’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 로마로 돌아온 대표단은 3년간 검토를 거친 후 기원전 451년 아테네 민주주의에 관한 보고서를 파트리키 위원회(데켐비리)에 제출했다. 데켐비리는 1년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공화국 운영 방식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임무를 위임받았다. 그 결과 10표법이 탄생했다. _88쪽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로마에서 공화국이 발달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한 탁월한 개인이 군주에게 새로운 정치사상과 통치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사상가 공자의 이야기이다. 공자는 노정공에게 성군이 되는 법을 가르쳐서 질서가 바로 선 세상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성군의 모범으로 삼고, 주공 단을 치세의 범례로 하여 혼란을 수습할 군주를 길러내고자 했다. 비록 그의 사상은 생전에는 위정자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하였지만―중국 최초의 통일은 법가사상에 근거한 진나라 시황제의 몫이 된다―결국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상으로 도약하게 된다.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다양한 사회 집단이 (적어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더 큰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된 오늘날에도 우리가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을 선택할 수 있는 범주는 고대인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들처럼 우리도 동의하는 자와 동의하지 않는 자 모두와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지속적인 참여와 상호작용 속에서, 고대사의 이 중요한 시기에 탄생한 사상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축의 시대의 유산 중에서 아마도 가장 역동적인 사상은 공자가 남긴 유교 사상일 것이다. … 오늘날 중국에서 유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장려된다. 하나는 서구의 오염을 중화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종교로서, 다른 하나는 동양에 적합한 민주주의의 잠재적 형태로서다. _400~401쪽

“이 안에 전쟁과 평화가 모두 담겨 있다” (카르타고에 파견된 로마 사신의 말)
● 기원전 3세기 말, 끊임없이 확장되는 제국의 경계. 젊은 통치자들의 패권 경쟁

2부 ‘전쟁과 변화하는 세계’의 주요 무대는 기원전 3세기 말의 동양과 서양 전체를 가로지르는 전쟁터이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서 권력의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젊은 통치자들이 등장했다. 서른 살의 한니발이 카르타고군을 이끌고 로마로 행진을 시작했고(기원전 218년), 열여섯 살에 왕위에 오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즉위 기원전 221년)가 지중해 중심부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눈을 돌렸으며, 이십대 초반의 청년 안티오코스 3세(즉위 기원전 223년)는 소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에 이르는 셀레우코스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동서를 가로질렀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스물한 살에 왕권을 장악한 것도(즉위 기원전 221년), 유라시아 대륙 동편에서 진나라의 젊은 군주 조정이 제후국을 모두 제압하고 시황제(기원전 221년)에 오른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반도로 진격한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군을 연파하며 승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위기 속에서도 로마의 정치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면서 전쟁은 장기화된다.

폴리비오스는 『역사』에서 로마가 칸나에 전투에서 최악의 패배를 경험한 시점의 로마 정체를 논한다. 그는 한니발에 대한 로마의 대응에 훗날 로마를 성공으로 이끄는 체제와 로마인 특유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성격이 잘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극한의 공포가 도시 전체를 덮쳤지만 로마 체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멸망의 위협은 오히려 공화국을 구성하는 여러 기구(집정관, 원로원, 민회)가 서로 협력하도록 강제했다. 로마의 정치 및 군사 체제는 영웅적으로 도시를 방어한 역사를 바탕으로, 그 용맹함을 선보인 자에게 드높은 명예를 약속함으로써 유지되는 구조다. 패배에 직면하자 로마인들의 생존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_183쪽

제2차 포에니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 여파가 지중해 연안의 다른 나라로 확장되었다. 로마의 압박으로부터 잠시 해방된 필리포스 5세와 안티오코스 3세는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세력 확장에 나섰다.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했으며, 안티오코스 3세는 제국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결전을 벌이는 한편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수중에 넣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체스판 위에서 젊은 통치자들이 각축을 벌이던 기원전 210년대에 동쪽의 진시황제 역시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는 일의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는 법가를 제외한 다른 사상을 억압한 채로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여 전국을 통합하고 외부 세계와의 경계를 확립하는 일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건설된 5,000킬로미터 길이의 만리장성은 유목민의 침입을 막는 방어벽 역할을 넘어 신생 제국에 더 큰 일체감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상징으로 기능했다. 불멸을 꿈꾸던 그가 210년 천하 순행 중 사망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에서 새로운 역사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진시황제 사후 제국이 무너지고 중국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이틈에 잠들었던 사상들이 부활했다. 이 혼란을 정리하고 부상한 유방과 한나라는 새 수도에서 다시 한 번 국가 통합과 결속 작업을 시작하면서, 어떤 통치 철학이 가장 적합할지 고민했다. 한편 영토 확장 과정에서 한고조는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그 결과 한나라는 묵특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공주와 공물을 바치면서 변방 부족들과의 공존을 추구했다. 묵특이 이끄는 흉노는 그들만의 제국을 건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웃 유목민 부족(특히 월지)을 서방으로 몰아냈다. 불안정한 ‘원형 교차로’인 중앙아시아를 향한 민족 대이동은 동과 서의 역사가 최초로 동시에 기록하는 사건이다. _249쪽

“가까이 오너라. 오, 선택받은 아들들아” (아소카 대왕의 비문에서)
● 기원후 4세기 초, 하나로 연결된 세계.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다

3부 ‘연결된 세계의 종교’에서는 마침내 연결된 고대 세계에서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면서 발생한 종교적 변화와 혁신을 다룬다. 기원후 4세기 초에 문명 세계 각지에서 종교는 통치자가 권력을 확보하고 그 정당성을 강화하는 장치로 이용되며 이전과는 다른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기원전 1세기를 지나며 제정으로 돌아간 로마가 지배하는 지중해 및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수용되기 시작했을 때, 힌두교는 인도의 굽타왕조 치하에서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었다. 한편 중국으로 전파된 불교는 5호16국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 공식 종교의 위상을 획득해나갔다.
서기 312년 10월 28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당시의 또 다른 황제 중 하나인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제국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승리를 기념하며 로마 시내에 건설된 개선문에는 그날의 모습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기록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신의 영감을 받아, 그리고 그의 위대한 정신을 발휘하여 군대를 이끌고 정의롭게 싸워 폭군과 그 무리를 단번에 무찌르고 나라를 구했다.” 불과 1년 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로마제국의 또 다른 황제)는 밀라노에서 로마의 종교에 관한 칙령을 발포했다. ‘밀라노 칙령’은 오늘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로마의 모든 신앙에 대한 관용과 다양성의 존중을 확립하고 이교로부터 압수한 재산을 돌려주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로마인이 각자 원하는 신을 믿을 자유를 보장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로마의 전통이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을 강화했다. 그리스나 인도와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는 본질적으로 다신교 사회였다. 마치 온갖 음식이 차려진 뷔페처럼 각양각색의 신들이 존재했으며, 언제나 개인별로 또는 지역별로 선호하는 신이 달랐다. 새로운 신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신들의 새로운 변형이 로마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열광적으로 숭배되었다. 로마의 전통 종교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첫째로 (주로 공공) 의례에서 희생제가 중점을 이뤘던 점, 둘째로 신앙의 바탕에 황제?일반적으로 신과 같이 숭배되고 추앙받았다?에게 충성과 숭배를 바친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점이다. _280~281쪽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안에서 기독교와 기독교도들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할 것인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때, 그보다 먼저 문명세계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킴으로써 통치권을 확보한 국가가 있다. 바로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왕국이다.

통치자로서 티리다테스 3세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첫째는 로마제국과 사산제국 사이에 끼여 두 나라의 정책과 야망에 휘둘린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였다. 티리다테스 3세의 목표는 로마의 지원을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이 사산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계속 아르메니아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특히 312년 이후 기독교?남쪽과 에데사로부터 아르메니아로 서서히 침투하고 있던 기독교가 아니라, 로마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양성되고 인정된 기독교?의 수용은 당연한 결과다. _306쪽

인도에서는 불교의 자비가 힌두교의 확고한 계급성에 균열을 내면서, 지도자의 출신 가문보다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중시한 유목 민족과의 접촉이 증가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상업과 문명 교류가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굽타왕조가 정권을 장악했다. 인도의 전통적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야’가 아니라 제3계급인 ‘바이샤(상업을 담당)’ 가문 출신의 찬드라굽타 1세는 왕의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통합해 인도 역사의 황금기를 낳았다. 한편 실크로드의 동쪽 끝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그곳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촉발한다.

수세기 동안 불교의 가르침이 비단, 옥, 무명, 상아, 사향, 호박(보석), 몰약과 같은 귀중품을 비롯하여 코끼리, 원숭이, 앵무새와 같은 이국적인 동물들, 그리고 대두와 같은 일상품과 함께 무역로를 타고 전파되었다. 불교 사상은 동과 서를 잇는 여러 갈래의 탯줄을 따라 밀려드는 천문학, 역법曆法, 의학, 윤작법 등의 광범위한 지식과 한데 어우러졌다. … 소규모 지식층과 통치자들의 후원을 받아 불경 번역 활동에 전념하던 불교는 이제 무너져가는 제국의 유랑하는 백성들을 보듬어야 했다. _293,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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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시작하며 6
고대 세계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11
이 책에 관하여 13

1부. 축의 시대의 정치

연대표 22 머리말 24

1장 아테네 민주주의: 민중의 힘을 향한 갈망 30
개혁자 클레이스테네스 36
입법자 솔론 38
참주정의 도래 41
새로운 세계의 탄생 47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는가 50
공화국의 기원 54

2장 로마 공화국 정부의 완성 61
로마 왕정: 폭군과 성군 65
신생 공화국, 불의 세례를 받다 69
공화국의 기반을 다지다 77
바다 건너에서 답을 찾다 81
계급의 화합 86

3장 공자와 성군 91
고대 중국의 역사 기록과 영웅 93
쇠락 그리고 부활의 희망 100
현자의 출현 105
고대 정치체제에 대한 포괄적 접근 111
제자백가 117

맺음말 121

2부. 전쟁과 변화하는 세계

연대표 128 머리말 131

4장 새로운 세대의 부상 141
서쪽에서 로마에 저항하다 144
불안정한 중앙부 153
동방의 제국 162

5장 관계의 성립 168
지중해에서 동맹이 형성되다 170
아시아와 중국의 단독 통치자 187

6장 동방과 서방의 제국 206
세력권을 방어하다 207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다 221

맺음말 245

3부. 연결된 세계의 종교

연대표 254 머리말 257

7장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종교 혁신 271
내부로부터의 종교 혁신 273
외부로부터의 종교 혁신 287

8장 종교의 강요, 공존, 결합 308
신구의 갈등 311
신구의 공존 318
신구의 결합 330

9장 종교와 통치 349
하나의 종교, 두 명의 통치자 351
다수의 종교, 한 명의 통치자 373
다수의 종교, 다수의 통치자 378

맺음말 391

마치며 397

감사의 말 408
옮긴이의 말 410
주 413
참고도서 449
찾아보기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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